윤선도尹善道

어부사시사

littlehut 2015. 3. 14. 23:13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어부사시사]는 강호미학의 정점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어부가라는 전승의 기반 위에서 가장

드높은 미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그것은 이 작품 이후에는 더 이상 뛰어난 작품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의

미이이기도 하다. 요컨대 조선조 [어부가]의 전승은 [어부사시사]를 기점으로 하나의 큰 전환을 이룬 셈이다. [어부사시사]의

진경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그 역사적 좌표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있었던 [어부사]는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옛 시를 집구하여 곡을 붙인 것이다. 이것을 읊조리면

강바람과 바다의 비가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생겨 사람들로 하여금 표연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설 뜻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농

암聾巖 선생도 좋아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았고, 퇴계 선생도 탄상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음향이 말에 상응하지 않고 뜻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은 대저 옛것을 모으는 데 얽매인 탓이다. 따라서 옹색한 결함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 뜻을 더 보태고 우리말을 사용해서 [어부사]를 만들어, 사계절을 각 한 편으로 하고, 한 편을 각 10장으로 구성하였다.

나는 곡조와 음률에 대하여 망령되이 감히 논할 수 없는데다, 창주지도滄洲之道에 대해서도 사사로이 덧붙일 수 없지만, 맑은

못이나 넓은 호수에서 조각배를 띄우고 즐길 때면 사람들로 하여금 목청을 같이하여 노래 부르게 하고 서로 노를 젓게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뒷날 창주에서 노니는 일사逸士는 반드시 내 마음과 기약되어 오래도록 서로 느끼지 않

을 수 없을 것이다.

신묘년(1651) 가을 9월에 부용동에 사는 조수釣叟는 세연정의 낙기란樂飢欄가에 있는 배 위에 이를 써놓고 아이들에게 읽도록

보이노라.

 

-윤선도, [어부사시사] 발문

(이형대. 어부형상의 시가사적 전개와 세계인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하고 박사 학위논문 . 1998. 70~71쪽 참조)

 

 

[어부가]는 어부 형상을 통해 미의식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말한다.  전국시대의 [초사楚辭]에 실린 굴원의

[어부]가 그 기원이다. 이 작품은 굴원과 어부, 둘 사이의 대화와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가 드높은 이상을 지닌 유학자

라면 후자는 은일적 현자에 해당한다. 여기서 굴원은 차라리 상수湘水에 몸을 던질지언정 세속의 티끌은 뒤집어쓸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실제로 그는 초나라가 멸망할 무렵 장사長沙의 멱라수에 투신했다) 이 때문에 그는 후대 유학자들의 전

범으로 추앙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구절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테요, 창랑의 물이 흐리

면 내 발을 씻으리라"는 대목이다. 어부가 굴원의 비장한 결단을 다분히 도가적 냉소주의로 대응하는 장면이다. 이때의 어부 형

상은 세속 정치를 비판적 시선으로 주시하고 만물과 더불어 호흡하는 현자의 그것에 가깝다.

그 후 위진시대에 이르러 산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 [어부가]의 전통은 한층 심화된다. 동진시대를 주름잡던 저 유명한

도연명의 [도화원기]가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거기에서 어부 형상은 도원경, 곧 도가적 유토피아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현실

정치와는 그만큼 더 단절된 셈이다. 그리고 중국 문학의 번성기이기도 한 당송시대에 이르면 [어부가]는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

되어간다. 대표적인 것이 소식蘇軾의 [적벽부]와 주희의 [무이도가武夷櫂歌]이다.  이 작품들에는 경물의 묘사로부터 산수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라는 의취가 뚜렷하다. 하여 이 작품들은 우리나라 [어부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중국 고대로부터 형성된 [어부가]의 전통은 동아시아 전체에 두루 유입되었다. 동아시아 사대부들은 어부의 초탈한 정

신세계에 공감하면서도 그 주체를 지역적 시대적 추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시켰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어부가]는 어떤 전승 경로를 거쳐 고산에까지 이르렀던가?

 

출발은 고려 후기, 곧 무신 집권기부터다. 하지만 당시엔 몇몇 한시에서 더러 눈에 띄는 수준일 뿐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구체적으로 문학사에 등장한 것은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있는 [어부가]가 최초다.

이 작품은 민요인 [어부 노래]에서 출발하여 궁중악으로 편입된 것이다. [악장가사]는 조선 왕조의 건국 이후 고려 때까지의

음악을 정리한 악보다. 거기에는 [한림별곡翰林別曲] 같은 귀족적 작품도 있고 [청산별곡]이나 [가시리]같이 민중적 노래들

도 있다. 흔히 '공부孔府'라는 고려 말 사대부에 의해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유일한 편자로 보기는 어렵다. 그를

포함한 여러 사대부들이 이 [어부가]의 창화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부가]가 특히 여말 선초에 광범하게 향유된 것은 당송시대의 작품들이 많이 유입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시적 이미지

와 정서면에서 여러 모로 어필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극심한 격변기를 늘상 '물러남'과 '나아감'의 긴장 속에서 보내야

했던 사대부들의 존재 자체가 가짜 어부, 곧 낚시가 생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무얼 낚는가? 쉽게 말해 세월을 낚는다. 시

선은 바다를 향하고 있지만 마음은 저 머나먼 구중궁궐을 향하고 있다. 몸은 강호자연에 의탁하고 있지만, 불러주기만 한다면

언제든 낚싯대를 접고 현실 정치의 장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요컨대 강호에서 어부로 지낸다는 것은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기댈 수 있는 '시적 포즈'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왕조의 출범 이후 [어부가]는 사

대부 계급의 미의식을 대표하기애ㅔ 이르렀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그 초기 성과에 해당한다.

 

 

[어부사시사]는 전체가 모두 4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춘하추동 각 계절마다 10수씩 배치되어 있다. 맹사성의 작품 구조와 일

치한다. 하지만 양에 있어서는 비약적으로 증식되었다. 어부의 시선으로 사계절의 순환을 깊고 넓게 표현하겠다는 야심찬 의

도가 깔려 있다.

하여 이 작품은 다른 시조들과 달리 몇 가지 특징적 국면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음구의 다양한 활용이

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뫼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 어사와於思臥

강촌江村 온갓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春詞' 14수, [고산유고]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닺 들어라 닺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대는 쥐여 있다 탁주인병濁酒人甁 실었느냐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 24수, [고산유고]

 

'춘사 가운데 두 작품이다. '지국총'은 전 작품에 공통되는 흥을 돋우는 여음구이고, '배 떠라' 역시 여음이지만 계속 바뀌어

변용된다. 각 편의 1장에서 10장까지의 변화를 보면, '배 떠라', '닺 들어라', '닺 달아라', '이어라', '돛 지어라', '배 세워라',

'배 매여라', '닺 지어라', '배 붙여라', 등인데, 이것은 출어出漁에서 귀범歸帆의 과정에 맞추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각 계

절을 다시 하루의 과정으로 압축해놓은 격이 된다. 이러한 여음구의 활용은 어부 노래가 지닌 민요적 기반을 말해주는 것이

기도 하다. 즉 [어부가]가 기본적으로 가어옹이라는 사대부들의 시적 포즈를 담고 있긴 하지만 어부의 삶을 다루는 한 진짜

어부들의 일상과 리듬이 그 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상층 장르와 하층 장르의 교섭 양상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

다.

 

 

어와 저물어간다 연식宴息이 마땅토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데 흥치며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雪月이 서봉西峯에 넘도록 송창松窓을 비껴 있자         - 윤선도, [어부사시사] '동사冬詞', 10수, [고산유고]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의 후대적 전승 양상이다. 웬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천택金天澤이 편찬한 최초의 시조집인 [청구영

언靑丘永言](1728)에는 이 작품이 실려 있지 않다. [어부사시사]가 등장하는 것은 김천택의 후배격인 김수장이 편찬한 [해

동가요]부터다. 그런데 이 시조집들에는 각 작품들이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운 별이 쬐얏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물을 주어두랴 낚시를 놓으리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좋왜라 탁영가濯瓔歌의 흥이 나니 고기도 잊을로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5수, [해동가요]

 

이 작품은 [해동가요](일석본)에 실린 것이다. 놀랍게도 종장의 첫음보에 '좋왜라'라는 감탄 어구가 첨가되어 있다. 그렇게

되자 두 번 째 음보는 '탁영가의 흥이 나니'로 엄청 길어졌다. '소음보+과음보'라는 종장의 완결 패턴을 구현하게 된 것이다.

[해동가요]뿐 아니라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등의 여타 가집들도 다 이런 식으로 각 작품을 독자적으로 완성형으로 변용

시켜 놓았다.

이 사실은 시조가 얼마나 견고한 완결 장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어부사시사]가 얼마나 독창적인 구

조를 지녔는지를 증명해준다. 요컨대 고산은 한 수 한 수를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동시에 40수 전체가 하나의 파노라마를 이

루도록 배치한 것이다. [어부사시사]의 시조사적 위상은 이런 배열만으로도 충분히 독보적이다.

 

그는 자연경관에 도취하여 감수성의 청정한 유로를 시도하면서도 자신이 사대부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그의

한계임에 틀림없다.  그런 지향이 드러난 작품일수록 공감력이 한층 떨어진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적 추동력이 아니었을까? 무슨 소린가 하면, 그의 정치적 지향은 적어도 입신양명에 대한 미련은

아니다. 자신의 이념을 현실에서 오롯이 실현하고자 하는 견결한 의식의 발로다, 그 의식의 저변에 바로 고산 특유의 감수성

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부용동에 있을 적에 그는 항상 낙서재에서 기거했는데, 아침은 닭의 울음소리와 같이 일어나 반드시 경옥주 한 잔을 마시고는

자제들에게 강講을 했다. 그리고 조반을 먹은 후에는 사륜거에 올라타 악기를 수행시킨 다음 회수당 혹은 동천석실에 가서 놀

았다. 때때로 홀로 죽장을 짚고 낭음계에 나와 노래했으나 날씨가 좋으면 반드시 세연정에까지 갔다.이때는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사람들을 소거小車에 싣고 자기는 그 후방에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갈 때는 곡수대曲水臺

의 후록後麓을 통과하여 도중 정성암靜成庵에서 한 번 휴식을 하고 세연정에 도착하면 곁에 자제를 시종케 하고 어여쁜 계집

아이들을 줄을 짓게 하고 작은 배를 연못 위에 띄우고 동남녀童男女들의 찬란한 채복綵服의 자태가 수면에 비치는 것을 보면

서 [어부사시사]를 유연히 노래 부르게 하고 혹은 배를 버리고 당상에 올라가 사죽관현絲竹管鉉을 연주케 했다. 혹은 사람을

뽑아서 동대, 서대로 나누어 서로 마주보고 춤추게 하거나 선무자善舞者를 택하여 긴 소매로 옥소암玉簫岩 위에서 춤추게 하

여 못에 떨어지는 그림자를 보고 즐기곤 했다. 혹은 바위 위에서 낚싯줄을 다루어 고기 낚시도 하고 혹은 동서의 섬에서 채연

탄악採蓮歎樂도 해보았다. 이와 같이 하루의 환락을 마음껏 하고 날이 저물어야 비로소 귀도歸途에 올랐다.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있지 않는 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을 일과처럼 계속하여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필자 미상,[가장유사]

 

아마 조선조 사대부들 가운데서도 이런 식의 풍류를 맛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사대부 문화는 소담한 정자문화로

대변되는바 이들은 관념에서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소박하고 담백함을 이상으로 삼앗다. '안빈낙도', '청빈고도'등 사대

부적 표상들을 떠올려보라. 그런데 고산은 바로 이런 일반적 패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풍류문화를 창안했던 셈이다.

중앙 정계에서 정쟁이 있을 때마다 고산의 호사스런 은둔 생활이 문제시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성격과 삶의 일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학유공(고산의 장자 인미)은 늘 가사를 간검看檢하기 위해 육지에 있다가 수개월이 되면 공을 찾아뵈었다. 이때 공은 그가

온다는 말을 듣게 되면 격자봉의 정자 모든 곳에 사람을 보내어 북을 울려 서로 호응케 하는가 하면 노복을 시켜 황원포에

나와 맞이하게 했다. 학유공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큰 소리로 공의 안부를 묻고는 달려가 골짜기로 들어가노라면 공은 벌써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맞이 했다 하니 그 사랑과 연모의 정이 돈독하기 이와 같았다.                            - 윤위. [보길도지]

 

이 기록을 보건대 고산은 퍼포먼스에 능란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감정의 흥취를 안으로 절제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멋지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하는데 더 익숙했던 것이다. [어부사시사]의 독특한 미감에는 이러한 삶의 무늬가 짙게 투

영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성취의 밑바탕에는 고산의 특유한 개성 이외에도 지역 전통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고 보기도 한다. 즉 도학적

분위기가 주도한 안동 지역과 달리 송순 정철 등을 배출한 광주 나주 지역의 문예 취향적 흐름이 직간접으로 고산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어부사시사]가 [어부가]의 맥을 잇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오랜 공백이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을 메워주는 것이 광주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계산풍류의 시맥이다. 당시 영남

지역과 호남 지역은 정치적 분파와 무관하게 커다란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즉 안동 지방이 도학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

던 데 비해 광주 나주 지역은 학문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고 문예 분야가 발흥했던 것이다. 일찍이 임억령, 박상(朴祥. 1474~

1530) 등을 배출한 이 지역의 시맥은 송순 정철 등과 같은 빼어나고 개성적인 시인들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맥은 특히 자연

미의 추구를 주조로 했던바, 그 도도한 흐름이 고산에게 총집결된 것이다.

그 결정체가 바로 [어부사시사]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산 시조의 절정이자 조선 전기 사대부 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

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윤선도 평전

지은이: 고미숙

펴낸곳: 한겨레출판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