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선비와 기녀> 19세기, 종이에 담채, 19.5x33cm, 개인 소장
자, 이제 좀 놀아볼 성싶은 남녀들을 돌아볼 차례다. 작자 미상의 <선비와 기녀>는 속된 말로, 지금 막 '작업'이 진행되는 순간을
그린 풍속화다. 모티프나 필세筆勢가 신윤복을 빼닮은 그림이고 등장인물의 자태마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나오지만, 엄격한 전
문가들이 그래도 신윤복 작품은 아니라고 했다. 얼른 보면 전통무용이나 뮤지컬의 한 장면 같다. 두 남녀의 맵시에서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의 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선비의 날리는 두루마기 자락은 멋이 넘친다. 부채를 든 손으로 갓을 바로잡는 사내는
주머니를 두 개나 찼다. 하나는 향을 넣은 주머니인데, 멋쟁이에 한량기질이 다분한 차림이다. 여인은 전모를 썼다. 전모는 삿갓
모양의 대나무 테두리에 기름 먹인 종이를 바른 나들이용 모자다. 갓끈과 전모끈, 두루마기와 치마가 한 방향으로 나부끼는 게
교묘하다. 다들 놀아본 가락이 매무새에서 풍긴다. 은밀하게 교차하는 남녀의 시선에서 이성간의 인력引力이 절로 느껴진다.
별일은 이 다음에 펼쳐질 테다. 눈길에서 마음의 교신을 나눈 남녀, 한 발 더 나아간 대거리를 주고받을 만하잖은가. 퍼뜩 선조대
의 문인 임제林悌와 기생 한우寒雨의 저 유명한 멘트가 겹쳐진다. 밉살스럽지만 인용해보자. 한우의 이름 뜻이 '찬 비'라서 임제
는 이런 말로 운을 뗀다.
북천北天이 맑다 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 온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얼어 자다'에 진한 속뜻이 숨어 있다. 알다시피 '남녀 교합'이다. 한우가 질세라 한술 더 올린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원앙침은 부부가 베는 베개요, 비취금은 비취를 수놓은 이부자리다. 이불이 따뜻해서 몸이 녹는 게 아니다.
놀아도 이리 놀아야 잘 논다는 소리를 들을까. 무슨 남녀가 만나자 마자 댓바람에 한이불을 덮느냐고 삿대질하지 마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면 농익은 눈빛으로도 문지방은 족히 넘는다. 밤새 운우지정을 나눈 남녀는 헤어
질 때 또 어떤 수창酬唱을 벌일까. 여자가 말을 타고 돌아가고 남자가 문밖에서 배웅한다 치자. 남자는 못내 섭섭한 마음을 시
한 수에 담아 내뱉는다.
혼이 그대를 따라가 버리니 / 텅 빈 몸만 대문에 기대네
여자는 말 위에서 돌아보며 나직이 되받는다.
나귀가 더뎌 내 몸 무거운 줄 알았더니 / 하나가 더 실려 있었구려, 그대의 혼
출처: 사람 보는 눈 / 손철주
펴낸곳 : (주)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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