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교동에 공관을 새로 짓고 이사했다. 그는 문장에 능했다.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하남 섬서성으로 해서 촉蜀에까지 들어갔다가 삼협三峽으로 나와서 오吳 초楚 지역까지 유람한 인물
이다. 그의 기행을 쓴 잔운협우기 라는 책이 있는데, 이홍장李鴻章이 서문을 썼다. 이미 공사로 부임하여 서
울에 왔을 때 김옥균 일파와 사이가 좋아져 친밀해졌다. 김옥균 등이 정의를 쏟으며 성원하여 광관을 옮겨
가까이 끌어들이려 하였는데 죽첨 공사가 이를 따른 것이다.
10월 17일 무자 밤에 박영효 김옥균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갑신정변] 대궐을 침법하고 임금을 경우궁으로 옮
겼다. 좌찬성 민태호, 지사 조영하, 해방총관 민영목, 좌영사 이조연, 우영사 윤태준, 전 영사 한규직 등을
왕명으로 속여 불러들여서 모두 죽였다. 환관 유재현은 난을 일으킨 역적들을 꾸짖다가 죽임을 당했다.
처음 박영효등은 일본, 서양 제국과 통교하여 부강을 누리고자 하였으며, 예부터 내려오는 풍속을 모두 버리
고 서양제도를 배워서 개화의 결실을 맺기 위해 힘썼으나 임금의 우유부단함을 걱정하였다. 또한 정책이 여
러 사람에게서 나와 획일적인 법을 실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모의해서 임금을 위협하고 궁을 옮겼
다. 민태호 등 수구파 대신 및 장졸들을 모두 제거한 후, 일본을 후대하여 군대를 이끌고 와서 청국군을 방어
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이 성공하면 하고자 했던 계획들을 차례로 행하려 하였다.
그들이 일을 꾸민 지 오래되자 모의가 차차 누설되었다. 서재필은 윤태준의 이질이 되는데, 마침 윤태준에게
들렀다가 태준이 국수상을 받고 있어 함께 먹게 되었다. 태준은 박영효의 일파가 큰 일을 내리라 한다는 사실
을 물으면서, "장차 대사를 행한다고 하던데 너는 듣지 못했느냐?"하니, 서재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저를
놓고 나가더니 오래되어도 들어오지 않아서 이미 달아난 것을 알았다. 윤태준은 크게 노하여 민태호에게 일
러바쳤다. 민태호가 말하되, "영감께서는 이제야 비로소 들었단 말이오? 나는 벌써 오래되었소. 그러나 일이
의심스러우니 마땅히 대간에게 취지를 알리고 상소해서 울릉도 사건을 논의하여 김옥균을 추궁하면 단서가
반드시 잡힐 것이오."하였다. 그때 김옥균이 일본에 가서 울릉도를 팔았다는 말이 있었다. 김옥균 등은 일이
이미 탄로 난 것을 알고 일을 앞당겨 거행할 것을 기약하였다.
(10월) 17일 밤에 우정국에서 연회를 베풀고 모든 제신들을 초대했으나 거의 대부분 오지 않았고 오직 민영
익만이 이르렀는데, 주모자들은 민영익을 친근하게 접대하였으니 일을 은페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불이 났다. 민영익이 보러 뛰어나가는데 한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그를)내리치자, 귀가 떨어졌으며
칼날이 어깨에까지 미쳤다. 민영익이 땅에 쓰러지자 목인덕이 그를 부축하여 달아났다. 박영효 등은 급히 대
궐로 달려가 궐문 밖 곳곳에 불을 지르게 하고, 큰 소리로 함성을 질러 기세를 돋우웠다. 중희당에 들어가서
숨을 헐떡이며, "청나라 사람들이 난을 일으켜 기박하니 상감께서는 잠시 일본 공관으로 가셔서 사태를 지켜
보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은 좇으려 하였으나 중궁이 말하기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서둘러 가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하며 반대했다. 박영효가 말하기를 "그러시면 경우궁으로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온갖 방법으로 겁박하엿다. 민영교는 앞에 엎드려 왕을 끌어 업고 경우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나서)"일병
래호日兵來扈의 네 자를 어필로 쓰게 하여 일본 공사관에 전하니, 죽첨 공사는 군대를 이끌고 바로 달려와서
궁의 담장을에워쌌다.
날이 밝자, 적당들은 교지를 속여 민태호를 임금이 찾는다고 하였다. 조영하는 민태호에게 이르되, "지금 상
황이 예측하기 어려우니 모든 병영의 군사를 일으키고, 원세개 진영에 연락해서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
가는 것이 가히 만전을 보장할 수 있소."하였다. 민태호는, "상감은 포위된 가운데 있어 수조手詔를 내려 급
히 부르는데 우리가 어찌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마땅히 먼저 들어갈 테니 공은 뒤처리를 잘하고 들
어 오시오." 하였다. 조영하도 창졸간에 따라 들어갔고 민영목 이하 여러 사람도 어지러워 몸 둘 바를 모르다
가 또한 감히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가자 서재필은 생도들을 거느리고 칼을 휘드르며 맞이해 내려치
니 차례차례 모두 죽었고 몸 전체가 떨어져 나갔다. 임금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할 뿐
이었다. 조영하는 칼을 맞고 바로 죽지 않았으며 큰 소리로, "조선의 국법에 누가 문신은 칼을 차지 말라고
하였는가?" 수중에 칼이 있어 너희 무리들을 만단으로 베이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다." 하였다.
중관中官 유재현이 임금께 수라을 올리자 김옥균이 그것을 걷어차며, "지금이 어느 때인데 수라 따위를 편안
히 들고 있겠는냐?" 하니 유재현이 크게 꾸짖되, "너희 무리들은 모두가 교목喬木의 귀경貴卿들이 아니냐?
무엇이 부족하여 이런 천고에 없는 미치광이 반역을 일으키느냐?"하니, 김옥균이 칼을 빼어 후려치자 그는
층계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이것을 본 임금은 벌벌 떨었다.
김옥균은 옥새와 옥로玉鷺를 들추어내어 박영효에게 주면서 말하되, "곧바로 즉진卽眞하는 게 좋겠소." 하
였다.
반란 주모자들은 임금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 심상훈이 그들을 달래어, "대가들이 무능하게 되어
공들을 편안하게 하여 줌이 족한데 제공들은 무었을 꺼리고 무엇을 두려워하여 천하의 악명을 얻으려 하는
가?" 하니, 적당들은 마침내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심상훈은 임금을 호위하고 함께 섞여서 들어와서
적당들의 흉측한 행동을 보고 앞에서 충성을 다하니 적당들도 그를 신임했던 것이다. 임금도 다행히 화를
면했으니 심상훈의 힘이 크게 작용했으며 시종하던 제신들 또한 자못 그에게 의뢰했다.
수조手詔 :임금이 친히 쓴 조서
옥로玉鷺 : 해오라기 모양의 장신구로 높은 벼슬아치나 외국으로 가는 사신이 갓 위에 달았음
즉진卽眞 : 정식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뜻.
10월 18일, 갑신정변의 주모자들은 서로 부서를 나누어 홍영식은 영의정이 되고, 김옥균은 좌영사가 되고, 서
광범은 우영사가 되었다. 군사와 재정에 관련한 아문衙門은 모두 자기네 당파 사람들을 심어 놓았다.
이재원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이재원은 운현의 장조카이며 임금과는 종형제 간이었다. 정변의 주모자들은
만에 하나 일이 낭패하게 되면 이재원을 빌려 구실로 삼고 그것을 미봉해 보려 한 것이었다.
10월 19일, 청나라 제독군문 원세개가 대궐에 들어와 호위했다. 일본 군대는 퇴각했으며 임금은 북관묘에 행
차하셨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복주伏誅 당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군을 끼고 도망쳤다. 임금이 환궁할 때에 원세개는 하도감(下都監,
훈련도감의 본영)에 주둔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대궐안에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정세를 측량할 수 없어 갑옷을 입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전 승지 이봉구가 보루를 치고 통곡하며 급히 와서 구원해 줄 것을 호소하니, 원세개는 소매
를 떨치고 일어나 2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문에 이르렀다. 일본 군인들은 송혈담(소나무 담장 구멍)을
의지하고 격투를 벌였으며 탄알이 비 오듯 쏟아졌다. 원세개는 변발한 머리를 목에 감고 뛰어올라 수문 병졸
을 죽이고 칼춤을 추며 충돌하니 전신이 배꽃[梨花] 같았다.
공사 죽첨진일랑은 군졸을 모아 철수하니 박영효 등은 일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간파하고 죽첨공사를 따라
도주했다.
임금은 창덕궁에는 군인과 총칼이 난무하기 때문에 잠시 북관묘에 머물도록 하였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기세
가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아서 그때까지도 임금을 모시고 힘을 믿었던 관계로 임금을 따라 북관묘에 이르렀다.
(그들은)어탑御榻에 둘러서서 "어서 빨리 어찰을 내려 원세개의 군대를 물리치게 하라"고 서둘렀다.
임금은 두려움이 진정되지 않아 잠깐 일어나려고 해도 두 사람이 임금을 잡아끌어 앉히며, "전하께서는 한 발
자국도 떠날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때 많은 군이들이 계단 밑에 몰려 있었으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무예청에서 먼저 "역적들을 죽이라"고 소리치니, 모든 군인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홍영식과 박영교 두 사람
을 들어 땅에 내던지고 칼로 난도질을 치며 모든 군사들이 만세소리를 외쳤다.
날은 저물어 길은 보이지 않는데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집을 헐어 불을 피워놓고 횃불을 밝히기도 하였다.
도성 안 백성들은 "개화당(왜당)"의 정변 모의에 대해서 분노하였다. 만나기만 하면 잡아 죽였으며 여러 사람이
떼로 몰려가서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 죽첨 공사와 박영효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당시 주동했던 네 명의 역적은 도망쳐서 국법을 펴지 못했으며 , 이미 죽은 사람 또한 모두 역적의 죄과로 다스
리지 못했는데, 이는 일본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분함을 참지 못했다.
출처: 매천야록梅泉野錄 / 黃玹 著
李章熙 譯 , 明文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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