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를 낳으신 날 아침에 당신께 가장 먼저 전화를 드렸습니다.
"엄마, 나 낳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잘 살겠습니다."
서둘러 아이들을 깨워 할머니한테 인사하라고 전화를 바꿔줬지요.
"할머니, 감사해요. 우리 아빠 낳아주셔서요. 우리 아빠 오래 살 거니까 할머니도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해요."
이 전화를 드릴 수 없게 된 지 서너 해 됐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전화기에 대고 어머니께 혼자 쫑알쫑알 세상의 일을 일러바쳤습니다.
당신 안 계신 동안 겪은 억울한 일과 아픈 일과 힘든 일들은 일부러 빼고, 좋았던 일과 아이들의 기특한 새해 결심과 내가 새로 사귄 특별한 친구들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고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음성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통화를 해서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운명運命이란 인간을 둘러싼 선악, 길흉, 화복 등의 온갖 것이 초인간적인 위력에 의하여 조정되고 지배된다고 믿는 섭리를 이릅니다.
그런데 저 운運 자가 '옮긴다'는 뜻인데, 자동차 운전運轉할 때도 저 운 자를 씁니다.
세상의 길은 어떤 섭리로 이미 닦여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많은 길 중에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는 단 한 가지 만을 세상 모든 것에게 일러뒀을 뿐이지요.
바로 생명生命하라입니다.
태어났으니 오직 살라는 명령, 그 하나만을 준엄하게 내렸을 뿐이지요.
그래서 오늘도 묵묵히 내가 정한 길을 가보는 것입니다.
요행이나 행운, 이런 것에 마음을 뺏기고 현혹되지 않으며, 살아 있으니 삶을 다해 사는 일을 궁구하며 뜻한 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내게 내린 '살라'는 지상의 명령을 순순히 받드는 아침입니다.
출처: 이 미친 그리움 /림태주 산문집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불편한 책 (0) | 2026.07.02 |
|---|---|
| 온화, 여행자의 에티튜드 (0) | 2026.06.19 |
| 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0) | 2026.03.02 |
| 해석의 마법 (0) | 2026.02.16 |
|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 (0) | 2026.02.07 |